[누가복음 22:1-13] 12.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13.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오늘 본문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사탄에게 쓰임 받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대조되는 두 장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고, 그러는 중에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기로 합니다. 거기에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사탄이 들어갔다는 것을 다른 면에서 표현하면 유다가 사탄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사탄에게 쓰임을 받을까요? 사탄은 무엇..
[갈 5:13-26] (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오늘 13절은 두 가지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첫째, 원하지만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사용하라 할 수 있다고 무엇이든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도 자유이지만,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자유입니다. 남이 억지로 못하게 하면 억압이지만, 내가 안하면 자유입니다. 억지로 참으면 제약을 받는 것 같지만, 내 의지로 거절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고 싶도록 유혹합니다.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도록 ..
[갈라디아서 5:1-11]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사전이 말하는 자유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고 싶은데 못하게 하는 것은 억압이고, 원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유를 추구합니다. 자유로운 세상을 원합니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상, 무엇이든지 표현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을 원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제약 받고 구속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노출의 자유, 소유의 자유, 성의 자유 등, 무엇이든지 경계를 허물고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유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타락한 세상의 증거라는 것을..
[갈라디아서 3:1-9]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절) 사도 바울의 어조가 매우 강경합니다. 거짓 가르침에 미혹된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어리석도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며 강한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바로 눈 앞에 보이듯 분명한 사실인데, 왜 다른 가르침에 현혹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무력하게 하는 잘못된 가르침이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단순하고 분명한 것입니다. 거기에 무엇을 더해서도 빼서도 안 되는 명백한 복음입니다. 믿는다 하면서 삶이 따라주지 못한다 하여 행함과 순종과 삶을 지나치..
[갈라디아서 2:1-10]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분별한 진리를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분별하고 지킨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진리를 무너뜨리리려는 대적은 악한 모습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제”의 모습으로 “가만히” 들어옵니다. 같은 형제로 위장을 하고 있지만 “거짓 형제”입니다. 진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짜입니다. 신사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속에는 악한 의도가 있습니다. 친밀하게 다가와 가까와지면서 기회를 엿보아 우리가 가진 자유를 빼앗고 종으로 삼는다 하였습니다. 타협하..
[히브리서 12:1-11]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오늘 말씀은 릴레이 경주를 생각나게 합니다. 바톤을 가진 경주자가 온 힘을 다해 달려와 다음 주자에게 바톤을 넘겨 줍니다. 바톤을 받은 그 주자는 또 다음 주자를 향해 전력을 다해 달려갑니다. 믿음의 경주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앞에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믿음의 선조들이 믿음의 바톤을 이어받아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바톤을 우리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히브리서 11:1-7]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실상이요 증거라 하였습니다. 마음에 갖는 확신이나 신념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현실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달픈 현실을 외면한 채 미래에 대한 소망을 마음으로 확신하라는 의미로만 믿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주어진 소망을 미래의 것으로만 품지 말고, 현실의 삶에 실체로 가져와 그 안에서 실제로 현재의 삶을 살라는 의미로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처럼 그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와 상황만 보지 말고,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을 현재의 삶으로 가져와 보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
[히브리서 10:1-10]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구약의 백성들은 매년 반복되는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로는 그들은 온전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짐승의 제물 대신에 다른 “한 몸”을 예비하셨습니다. 큰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그 몸”으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입고 하나님 앞에 죄 없는 온전한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제물되신 그 제사는 “단번에” 드린 “영원한” 효력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해 온전하게 된 자들은 이제 다시 구약의 백성들과 같은 반복되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